康賢實(강현실)참어머님自敍傳(자서전)

康賢實 自敍傳 第1章「信實한 信仰속에서 成長」(信実な信仰の中で成長)

Author
fujio kim
Date
2019-03-15 14:08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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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賢實(강현실) 自敍傳(자서전)

第1章 成長(성장)과 入敎(입교)

信實(신실)한 信仰(신앙) 속에서 成長(성장)

나는 1927年 10月 1日(天曆 8月 20日) 慶尙北道 榮州(영주)市 榮州洞 82番地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향 榮州를 생각하면 푸른 山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小白山(소백산) 자락에 위치해 맑은 물과 푸른 山이 있어 아름다운 自然(자연)을 간직한 고장입니다.

또한 榮州는 선비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賜額書院(사액서원)인 紹修書院(소수서원)이 있어 충효를 자랑하는 선비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紹修書院(소수서원)은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세웠던 白雲洞書院(백운동서원)을 후에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紹修書院으로 승격시킨 후 많은 학자들과 충신들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榮州에는 善良(선량)하고 剛直(강직)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故鄕(고향) 榮州(영주)는 예전부터 基督敎 敎勢가 상당히 강한 지역입니다. 어린 시절에 敎會에서 예배가 열릴 때면 앉을 자리가 없이 사람들이 가득 찼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강직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基督敎 信仰도 열성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慶北(경복)에서는 榮州(영주)와 더불어 大邱(대구)와 安東(안동)이 열성적인 信仰人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특히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晋州(진주) 姜氏(강씨)의 集姓村(집성촌)이었는데, 대부분 敎會를 다녀서 마을 전부가 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晋州姜氏들의 신앙은 소문이 나서 「榮州(영주)에 있는 敎會 重鎭(중진)들은 거의 晋州姜氏(진주강씨)」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父親인 姜錫祉(강석지) 長老와 母親 權桂月(권계월) 勸士(권사)의 7男妹 中 長女(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家庭은 祖父(조부)께서 長老敎(장로교)에 입교하신 이후로 篤實(독실)한 基督敎 信仰을 지켜 오고 있었습니다. 父母님께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祈禱에 다니셨고, 저녁이면 아버지를 중심으로 家庭禮拜(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덕분에 저는 母胎(모태)에서부터 信仰生活을 시작해서 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가정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바로 믿고 따르기 위해 노력하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榮州敎會에서 40代에 長老로 將立(장립)을 받으셨습니다. 長老로 將立되기에는 젊은 나이였지만, 신앙이 독실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여러 사람이 추천을 해서 일찍 장로가 되셨습니다.

우리 집안은 사업을 했기 때문에 중산층 정도로서 窮乏(궁핍)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敎會 勸士(권사)로서 조용한 분이었습니다. 7남매를 키우면서도 큰소리 한 번을 낸 적이 없이 뒷바라지하며 사셨습니다. 자신을 내세우는 적 없이 겸손한 분이라고 주위에서 많이 말하곤 했습니다.

家庭(가정)에서 禮拜(예배)를 볼 때면 아버지는 늘 信實(신실)한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祈禱하실 때나 말씀하실 때면 「사람은 眞實(진실)해야 한다. 眞實하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떠나신다.」고 누누이 강조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 「眞實은 언제든지 眞實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우리와 더불어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眞實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또 家庭禮拜(가정예배)를 드릴 때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언제나 부르던 讚頌歌(찬송가)가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나직이 부르시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내 마음 속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讚頌(찬송)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언제나 眞實(진실)해야 한다.」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과 삶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버지는 늘 사석에서나 예배시간에나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렇게 사시려고 노력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敎會 안에서도 많은 분들이 姜錫祉(강석지)長老님은 眞實하시고 뜻대로 사시는 분이라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도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의 신앙을 따르며 자랐습니다.

父母님 덕분에 나는 올바른 신앙길을 가려고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신앙의 근본을 마음에 심어 주셨다면, 어머니는 습관을 길러 주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어머니와 같이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새벽에 어머니와 敎會에서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나는 어머니처럼 着實(착실)하게 말없이 하나님을 믿고 모시며 살아야겠다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러나 日帝時代(일제시대)에 신실한 신앙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제가 神社(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강제로 參拜(참배)를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30年代 후반부터는 교단 차원에 압력을 넣어 일반 신도들도 神社에 參拜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진실한 신앙을 하던 우리 가정에 큰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아버지의 친구인 한 牧師님이 영주를 찾아왔습니다. 그날 아버지와 그 牧師님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천황을 신으로 모시며 참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으신 듯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神社參拜를 拒否해서 警察에 끌려가 수감되시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경찰들이 가택수색을 하여 아버지가 평소 보시던 종교에 관한 책을 몇 수레나 싣고 갔습니다. 그런 뒤에도 삼일이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와서 어머니에게 고함을 치고 집안을 뒤지기도 해서 내가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경찰들이 가족들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큰 죄를 지은 죄인 취급을 하며 감시를 해서 자유롭게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신사참배를 안 하는 집안의 딸이라고 주위에서 미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매일 새벽 敎會에 나가서 아버지를 위해 간절히 祈禱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들의 마음속에 나타나셔서 그 잘못을 꾸짖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시며 유치장에 갇혀 있는 이들을 괴롭히지 말게 해 주십시오.」 하고 열심을 다해 祈禱드렸습니다.

수감될 때만 해도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獄中(옥중)에서 너무나 많은 拷問(고문)을 당해서 病(병)을 얻고 쾌차하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日帝는 아버지가 옥중에서 돌아가실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겨우 출옥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病이 깊어진 아버지는 해방도 보지 못하고 1944年 1月 3日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榮州敎會에서는 父親(부친)에 대해 「姜錫祉(강석지)長老는 日帝時代(일제시대)에 殉敎(순교)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집안에서도 직접적으로 순교를 한 것은 아니지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수감되었다가 병을 얻어 돌아가셨으니 강 씨 집안에 순교자 한 분이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되곤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변함없이 장로교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늘 「돌아가신 아버지를 영계에 가서 뵐 때 부끄럽지 않고 죄송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96年에 영육축복을 받았습니다.

神學의 길을 걷다

해방 이후에 나는 釜山으로 가서 高麗高等聖經學校(고려고등성경학교)를 거쳐 高麗神學校(고려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高麗神學校는 아버지의 친구인 韓尙東(한상동) 牧師가 설립한 학교입니다. 韓牧師는 日帝時代(일제시대)에 神社參拜(신사참배)를 拒否(거부)하여 옥중생활을 한 牧師들과 함께 신앙의 正道(정도)를 가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교회의 오종덕 牧師는 아버지와 친한 친구인 韓 牧師가 釜山에 神學校를 세웠으니 나에게 입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때 나는 신앙적으로나 학업적으로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神學校 입학을 권유 받았습니다.

당시 내 마음 속에는 아버지가 출감한 후 해방도 못 보고 돌아가신 것이 하나의 숙제로 남았습니다. 아버지가 가신 길을 이어받아 아버지가 못 다한 일을 계승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버지가 다 못 이루고 가신 것을 내가 이뤄 드려야 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못 다 이루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외적으로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高麗神學校(고려신학교)는 神社參拜(신사참배)를 거부했던 敎役者(교역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학교였기에 아버지가 품었던 뜻을 내외적으로 준비하기에 가장 적합한 학교였습니다.

1950年 高麗神學校(고려신학교)에 入學했습니다. 神學校를 다니는 동안 高麗神學校의 韓牧師가 나를 굉장히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런 사랑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도 정성을 다했습니다. 高麗神學校는 보수적인 학교라서 하루 60페이지 이상 의무적으로 聖經(성경)을 읽어야 했고, 세 시간 이상 祈禱를 해야 했습니다. 神學校를 다니는 동안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祈禱를 열심히 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祈禱하는 나를 보고는 「항상 그렇게 엎드려서 기도를 오래 하니 곱사등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高麗神學校는 매우 엄격하게 主日(주일)을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主日에는 어떠한 물건이든 사면 안 됩니다. 물론 전차표나 버스표도 사면 안 됩니다. 일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떨어진 단추를 달아서도 안 되고, 10里 이상의 먼 길을 걸어도 안 됩니다. 학교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받고 나니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는 聖經을 생명시하며 그 말씀을 따라서 바르게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마음속에는 「다시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主님은 언제 오시렵니까?」 하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나를 필연코 사랑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참으로 절대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2000年대가 되기 전에 오신다고 했기 때문에 이제는 오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 밝은 날에는 툇마루에 앉아서 달을 쳐다보며 「主님, 내가 참 사랑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 예수님도 날 사랑하시지요? 오신다면 누구보다 저를 제일 먼저 만나 주셔야 됩니다. 저를 제일 먼저 만나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神學校 수업이 끝나면 路傍傳道(노방전도)를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傳道(전도)와는 다르게 어떤 형식이나 의식, 제도, 법에 매여서 傳道하는 것이 아니라 내 피와 살과 뼛속에서부터 우러나는 心情(심정)으로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事情(사정)과 心情(심정)을 체휼한 나는 「내가 2千年 前 살아 있었다면 예수님께 위로와 소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인데….」 하는 마음에 가슴에서 통곡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예수님, 나는 부족하오나 내게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피가 흐릅니다. 이 지상에 인류를 구하고자 하는 뜻이 살아 있습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당시에 主님을 만나기 위해 늘 내적으로, 외적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절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랑으로 오신다고 했으니 신부 단장을 해야 되는데 내적으로, 외적으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主님 自己 東山에 오셨네

父親인 姜錫祉(강석지) 長老(장로)와 母親 權桂月(권계월) 勸士(권사)

父親 姜錫祉(カンソクチ)長老 母親 權桂月(クォンゲウォル)勧士(クォン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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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賢實(カンヒョンシル)自叙伝

第1部 成長と入教

主イエスがおられる所、そこはどこでも天の国

誠実な信仰の中で成長

高い山が、果てしない野原が、草木や宮闕(きゅうけつ)や
私の主イエスがおられる所なら、そこはどこでも天の国
ハレルヤ賛美しよう 私のすべての罪の赦しを受け
主イエスと同行するので、そこはどこでも天の国

私は1927年10月1日(天暦8月20日)慶尚北道(キョンサンブクド)榮州市(ヨンジュシ)榮州洞(ヨンジュドン)82番地で生まれました。故郷の榮州を思えば、青い山がまず初めに思い浮かびます。小白山(ソベクサン)のふもとに位置し、清い水と青い山があり、美しい自然が保たれた地方です。

また、榮州は学者の地でもあります。韓国最初の 賜額(しがく)書院である紹修(ソス)書院があり、忠孝を誇る学者たちが多く住んでいました。紹修(ソス)書院は、周世鵬(ジュセボン)が天賦の幸福を祭るために建てられた白雲洞(ペクウンドン)書院であったものを、後に李滉(イファン)が郡守として赴任しながら紹修書院として昇格された後、多くの学者や忠臣が輩出された所として有名です。だからなのか今も榮州には善良で剛直(ごうちょく)な人たちが多いようです。

故郷の榮州は昔から基督教の教勢が相当に強い地域です。幼いころ、教会で礼拝が持たれる時には、座る所がないほど人がいっぱいに満ちていた記憶が残っています。おそらく剛直な性格を持った人達が多いので、基督教信仰も熱情的な信仰をする人達が多か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慶尚北道(キョンサンプクド)には榮州と共に、大邱(テグ)と安東(アンドン)が熱情的な信仰者が多かった地域です。

特に私が生まれて育った村は晉州姜氏(チンジュカンシ)の姓が多い村でしたが、ほとんどの人が教会に通い、村全体がクリスチャンと言っても過言でなかったのです。晋州姜氏(チンジュカンシ)の信仰はうわさになり、「榮州にある教会の重鎮たちはほとんどが晋州姜氏(チンジュカンシ)」という言葉があるほどでした。

賜額(사액・しがく)書院:王が名前をつけて額を賜わり書籍·召使い·土地などを下賜した書院

私は父親である姜錫祉(カンソクチ)長老(チャンノ・ちょうろう)と母親の權桂月(クォンゲウォル)勧士(クォンサ)の七人兄弟の中の長女として生まれました。私の家庭は祖父が長老教会に入教した後から篤実(とくじつ)な基督教の信仰を守って来ていました。父母は一日も欠かさず早朝祈祷に通い、夕方になれば父を中心として家庭礼拝を捧げました。おかげで私は母胎にいたときから信仰生活を始め、いつも神様の御言葉の中で成長しました。家庭のすべての生活が神様を中心としてイエス様を正しく信じて従うために努力したのでした。

父は榮州(ヨンジュ)教会で40代で長老として任命を受けました。長老と任命されるには若い年でしたが、信仰が篤実で責任感が強くいろいろな人が推薦をして若くして長老になりました。

私の家は事業をしていたので生活水準は中流程度で窮乏(きゅうぼう)を感じるほど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母は教会の勧士(クォンサ)で静かな人でした。七人の兄弟姉妹を育てながら大声一つ出したこともなく、子供を世話しながら暮らしました。母は自分を前に出したことがなく、周囲の人たちから謙遜な人だとよく言われていました。

家庭で礼拝をするときになれば、父はいつも信実(しんじつ)な生き方を強調しました。祈祷するときや話しをするときには、「人は真実であるべき。真実に生きなければ神様が離れる」としきりに強調してくれました。父が、「真実はいつも真実そのまま現れるのである。神様は生きておられ私たちと共におられるから私たちはいつも真実に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われたことが今も思い出されます。

また、父が家庭礼拝を捧げるときだけでなく、いつも歌っていた賛美歌があります。「高い山が、果てしない野原が、草木や宮闕(きゅうけつ)や私の主イエスがおられる所なら、そこはどこでも天の国。ハレルヤ賛美しよう。私のすべての罪の赦しを受け、主イエスと同行するのでそこはどこでも天の国」と小声で歌った父の声は私の心に今も残っています。この賛美歌には、「神様と共にある者はいつも真実であるべき」と言われていた父の言葉と生き方が込められているように感じます。父はいつも私的な場にも礼拝時間にもそのように話し、そのように生きようと努力しただけでなくそのごとくに生きました。

それなので、教会の中でも多くの人達から、姜錫祉(カンソクチ)長老は真実であり御旨のままに生きる人として尊敬を受けました。自然に私も父を尊敬し父の信仰に従って育ちました。

父母のおかげで私は正しい信仰の道を行こうと努力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父が信仰の根本を私の心に植えてくれたとするなら、母は私に信仰の習慣を育ててくれました。幼い頃から私は父といっしょに早朝祈祷に通いました。夜明けに母と教会で祈祷をして一日を始めることが習慣になりました。早朝祈祷を終えて家に帰って来る道で私は、母のように着実に無言で神様を信じ侍り生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心に誓いました。

しかし、日帝時代に信実な信仰をすることは易しいことではなかったのです。日本が韓国に神社をいたるところに建て、強制的に参拝をさせたからです。特に1930年代後半からは基督教団にも圧力をかけ、一般信徒たちにも神社に参拝することを強要しました。真実な信仰をしていた私たちの家庭に大きな試練が始まるようになりました。

そうする中、ある日、父の友達である一人の牧師が榮州(ヨンジュ)を訪ねて来ました。その日、父はその牧師と長い時間話しをしました。どんな話をしたのかは知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が、天皇を神として侍り参拝することはありえないということで意見を合わせたようです。

結局、父は神社参拝を拒否し警察に引っ張られ収監されてしまいました。その以後、私の家は風飛雹散(ふうひひょうさん=四方に飛び散ること)になりました。警察が家宅捜索をし、父が平素読んでいた宗教に関する本をいくつかに分けて持って行きました。その後、三日も経たずして家に来て母を怒鳴りつけ家の中をひっくり返しもしたりして、私が学校に行けない日もありました。警察は私たち家族を人として扱わず、大きな罪を犯した罪人として扱い監視をしたので、自由に気を落ち着けて暮らす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さらには神社参拝をしない家の娘だと周囲から憎まれました。

それでも私は毎日夜明けに教会に出て父のために懇切に祈祷を捧げました。「神様を信じない人たちの心の中に現れてその間違いを叱ってやって下さい。神様が分かるようにして下さり、彼らが留置場に閉じ込められている人たちを苦しめないようにして下さい」と熱心に祈祷を捧げました。

収監されたときには健康であった父は、獄中であまりにも多くの拷問を受けて病気になり回復が難しくなりました。日本の警察は父が獄中で死ぬかもしれないと心配になり、やっと出獄させてくれました。しかし、すでに重い病気になった父は、終戦(1945年8月)を迎えることができないまま1944年1月3日に亡くなりました。

それで榮州教会では父について、「姜錫祉(カンソクチ)長老は日帝時代に殉教したようなもの」と評していました。拷問で直接殉教したのではありませんが、神社参拝を拒否し収監されてから病気にさせられて亡くなったのですから、姜氏一族から殉教者が一人出たという話になりました。

母は生きている間は変わりなく長老教会で篤実(とくじつ)な信仰生活をしました。いつも「亡くなった父と霊界に行って会ったとき、恥ずかしくないように、申し訳もしないようにしないといけない」という言葉をよく言っていました。1996年に父と母は霊肉祝福を受けました。

神学の道を歩む

終戦以後、私は釜山(プサン)に行って高麗高等聖経学校を経て高麗神学校に入学しました。高麗神学校は父の友達である韓(ハン)サンドン牧師が設立した学校です。韓牧師は日帝時代に神社参拝を拒否し獄中生活をした牧師たちと共に信仰の正道を行くため多くの努力をしました。長老教会の牧師は、父と親しい友達である韓牧師が釜山に神学校を建てたのだから私に入学するのがいいと推薦してくれました。そのとき私は信仰面でも学業面でも模範生だったので、積極的に神学校入学を勧められました。

当時私の心の中には、父が出獄した後、終戦を迎えられないまま父が亡くなったことが一つの宿題として残っていました。父が行った道を受け継ぎ、父が果たせなかった仕事を私が継承しなければという考えになりました。私の氏族に対する神様の御旨、父が亡くなって成せなかったことを私が成して差し上げなければという思いが心から離れなかったのです。

父が成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神様の御旨を成すためには、内外的な準備が必要でした。高麗神学校は神社参拝を拒否した教会関係者たちが中心になり建てた学校だったので、父が抱(いだ)いていた御旨を内外ともに準備するためにもっとも適した学校でした。

それで、1950年、高麗神学校に入学しました。神学校に通う間、韓牧師が私を大変可愛がって下さいました。その愛と期待に答えるため、私も最善を尽くして勉強しました。そして信仰生活にも精誠を尽くしました。高麗神学校は保守的な学校で、一日60ページ以上義務的に聖書を読まなければならず、3時間以上祈祷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学校に通う間、いつでもどこでも神様に祈祷を熱心にしました。母はそのように祈祷する私を見ながら、「いつもそんなに伏して長い間祈祷をしたら、背中が曲る病気になるのじゃないか心配」と言うほどでした。

高麗神学校は大変厳格に安息日である日曜日を守りました。例えをあげれば、日曜日にはどんな物も買ってはいけません。電車やバスの切符も買ってはいけません。仕事をしてもだめで、外れたボタンを縫うのもだめで、10里以上遠い道を歩いてもだめです。学校からはそのようにあれもだめ、これもだめだという教育を受けたので、どんな事も良心の呵責になり何もすることができなくなりました。

当時、私は聖書を生命視しその御言葉に従って正しく生きようと歯を食いしばって生活をしていました。そうしながら心の中では、「再び来ると約束された主はいつ来られるのだろうか?」という思いが火のように起こりました。

私はイエス様を本当に愛していたので、イエス様も私を必然的に愛して下さると信じました。その信仰は本当に絶対的でした。イエス様が来られる時が近づいたと考えたので、より心が懇切になりました。西暦2000年になる前に来られると聞いていたので、今、来られる時になったという思いになりました。月の明るい夜には縁側に座って月を見つめながら、「主よ、私は本当にあなたを愛します。私が愛するのと同じようにイエス様も私を愛されるでしょう?来られたら誰よりも一番最初に私に会って下さらないといけません。私に一番最初に会って下さると信じています」と祈祷しました。

そして神学校の授業が終われば路傍伝道をしました。普通の信者のようにある形式とかやり方に縛られて伝道するのではなく、私の血と肉と骨の中から湧き出る心情で叫びました。イエス様の事情と心情を体恤(たいじゅつ)した私は、「私が二千年前に生きておられたイエス様に慰労と所望(しょもう)の対象になるはずだから…」と、胸の中から痛哭(つうこく)の思いが湧き上がりました。「イエス様、私は不足ですが、私にはイエス様の切ない血が流れています。この地上に人類を救おうとする御旨が生きています」と叫びました。

当時は、主に会うためにいつも内的にも外的にも準備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考えが切実でした。イエス様が新郎として来られると言われたので、新婦の装い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内的にも外的にもイエス様を迎える準備をしながら暮ら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思いが心いっぱいに満ちていました。

(次回)主が私の園に来られた